서강대 본관 옆길을 걷다 보면 네거리 모퉁이에 옛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시계 하나가 서 있다. 검은 기둥 위에 둥근 문자판을 얹은 기둥 시계인데,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세운 시계탑이다. 캠퍼스를 지나갈 때마다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누가 세웠고 판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 앞에서 발을 멈추고 한참 살펴봤다.
본관과 학생회관 사이, 길이 갈라지는 모퉁이
시계탑 자리는 본관(A관)과 학생회관(C관) 사이 네거리 길목이다. 수업을 들으러 올라가는 사람도, 밥 먹으러 내려가는 사람도 이 모퉁이를 거쳐 간다. 캠퍼스 안에서 동선이 제일 많이 겹치는 곳 중 하나라 자리를 참 잘 잡았다 싶다.

뒤로는 본관이 버티고 있다. 세로로 길게 뻗은 차양이 칸칸이 짜여 있는 외벽이라 멀리서 봐도 금방 알아본다. 그 앞으로 도로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둥글게 다듬은 관목과 돌을 쌓아 만든 화단이 이어진다. 시계탑은 그 풍경의 오른쪽 끝, 나무 그늘이 드리운 모퉁이 화단에 발을 딛고 섰다. 흐린 날이었는데도 금색 테두리가 은근히 빛을 받아서 회색 하늘 속에서 제법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동문회장이 기증하고, 미국에서 만들어 왔다
알아보니 이 시계탑은 김호연 총동문회장(74학번, 무역학과)이 개교 50주년을 맞아 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제작은 시계와 시계탑으로 이름난 미국의 버딘 디자인 그룹(Verdin Design Group)에 맡겼다고 한다. 국내에서 적당히 만들어 세운 조형물이 아니라 전문 업체에 따로 의뢰해 들여온 물건이라는 얘기다.
수치로 보면 높이 5.44m, 무게는 599kg에 이른다. 가까이 서서 올려다보면 문자판이 머리 한참 위에 있어 생각보다 키가 크게 느껴진다. 받침대 부분도 묵직해서 가벼운 장식물이 아니라는 게 한눈에 보인다.
네 방향으로 난 문자판과 새겨진 문구

문자판은 네 면에 하나씩 달려 있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걸어오든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한 설계다. 흰 바탕에 검은 로마 숫자, 가느다란 시곗바늘이 달린 고전적인 얼굴이라 휴대폰 시계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오히려 새롭다. 기둥 중간중간 둘러 놓은 금색 띠와 꼭대기의 뾰족한 장식, 아래쪽 사각 받침대에 들어간 금색 테두리까지 디테일이 꽤 공들여 있다.
문자판 위아래로는 50주년 기념 문구를 새긴 판이 둘러져 있다. 네 방향에 각각 다른 글귀가 들어갔다.
- 서강대학교 개교 50주년
- Sogang 50th Anniversary
-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
이 가운데 세 번째 문구가 오래 남았다. 학교가 학생을 자랑스러워하듯 학생도 학교를 자랑으로 여겨 달라는 말인데, 졸업한 동문이 후배들이 매일 지나는 길목에 이 글을 걸어 두었다는 사실까지 겹쳐 보니 괜히 뭉클했다. 시계를 한 바퀴 돌며 네 면을 다 읽어 보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다.
캠퍼스 풍경에 스며든 시계
솔직히 처음엔 캠퍼스에 웬 유럽 거리풍 시계인가 싶었다. 그런데 몇 번 오가다 보니 이 자리에 제법 잘 녹아든다는 걸 알게 됐다. 무채색 본관 건물과 짙은 초록 나무 사이에 검정과 금색이 섞인 시계가 서 있으니, 딱딱할 수 있는 풍경에 작은 포인트가 하나 생긴 느낌이다. 너무 크지도 요란하지도 않아서 주변 조경을 해치지 않는 것도 좋다.
본관 근처에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다면 “시계탑 앞"만큼 헷갈릴 일 없는 약속 장소도 드물다. 급하게 강의실로 뛰어가는 길이라면 고개만 살짝 들어 시간을 확인하면 되고, 여유가 있는 날에는 잠깐 멈춰서 판에 새겨진 문구를 읽어 보자. 늘 지나치기만 하던 모퉁이가 조금 다르게 보일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