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하면 떠오르는 상징을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알바트로스 탑을 꼽는다. 정문을 지나 몇 걸음만 들어가면 원형 광장 한가운데에 뾰족한 돌탑이 서 있다. 입학하는 날에도, 졸업하는 날에도 이 탑 앞을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서강에서 보낸 시간이 이 탑에서 시작해서 이 탑에서 끝난 셈이다.

정문 쪽에서는 원뿔, 안쪽에서는 삼각형
이 탑은 보는 방향에 따라 생김새가 확 달라진다. 정문 쪽에서 들어오면서 보면 가로줄이 촘촘하게 들어간 매끈한 원뿔이다. 뒤로는 신촌 쪽 고층 건물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어서, 학교 바깥의 도시와 캠퍼스가 이 탑을 경계로 나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캠퍼스 안쪽으로 돌아서면 원뿔 한쪽이 칼로 잘라 낸 듯 깎여 나가 있고, 그 단면이 정면 역할을 한다. 커다란 삼각형 안쪽으로 오목한 면이 파여 있고, 그 한가운데로 스테인리스 기둥이 곧게 내려와 역원뿔 모양의 추로 끝난다. 탑 뒤편은 반원형 계단식 석단이 둘러싸고 있고, 양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캠퍼스가 시작된다. 석단에 앉아 있으면 광장 전체가 작은 야외 공연장처럼 보인다.


흐린 날 찍으면 탑의 회색이 하늘과 거의 같은 톤이 돼서 더 날카롭게 보인다. 분수가 멈춰 있을 때는 물이 고인 둥근 수반만 남아 조용하고, 물이 솟을 때는 광장 전체에 물소리가 깔린다. 같은 자리인데 분위기가 꽤 다르다.

옆으로 몇 걸음 비켜서면 탑 뒤로 유리 외벽 건물이 들어온다. 오래된 돌탑과 반짝이는 신축 건물이 한 화면에 잡히는 게 서강 캠퍼스다운 풍경이다.


동판에 적힌 이름의 유래
탑 앞에는 낮은 검은 받침 위에 ALBATROSS라고 적힌 동판이 놓여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녹이 슬어서 글자를 읽으려면 허리를 숙이고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 서강의 뜻과 꿈을 형상화한 탑이고, 진리에 순종하며 모교의 품에 돌아와 쉬었다가 다시 날아오르려는 서강인의 마음을 담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거대한 바닷새의 이름을 따서 ‘알바트로스’라 부른다고 끝맺는다.

학교 다닐 때는 그냥 ‘알바트로스 탑’이라고만 불렀지, 이 동판을 끝까지 읽어 본 기억이 없다. 이번에 사진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읽었다.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정작 무슨 뜻인지는 모른 채 졸업했던 거다.
OBEDIRE VERITATI, 진리에 순종하라
탑 정면에는 IHS가 들어간 방패 모양의 교표가 붙어 있고, 그 아래 고딕체로 큼직하게 ‘OBEDIRE VERITATI’라고 적혀 있다. 라틴어로 ‘진리에 순종하라’는 뜻이고, 서강대의 교훈이다. IHS는 예수회를 상징하는 글자인데, 서강이 예수회가 세운 학교라는 걸 가장 짧게 보여주는 표식이기도 하다.

진리에 ‘순종’한다는 표현이 처음엔 좀 낯설었다. 진리를 찾아라, 진리를 탐구하라도 아니고 순종하라니.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 말이 조금씩 다르게 들렸다. 내가 원하는 결론에 진리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진리가 가리키는 쪽으로 나를 움직이라는 얘기처럼. 서강 특유의 깐깐한 학사 관리, 적은 인원으로 꼼꼼하게 가르치는 분위기도 결국 이 한 문장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바닥에 둘러 새긴 한 문장
분수대 한가운데 둥근 단 가장자리에는 검은 타일에 흰 글씨로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가 한 바퀴 둘려 있다. 그 안쪽 작은 호에는 같은 뜻의 영어 문장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가 보인다. 추 끝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이 문장들 한가운데다.

교훈이 학교가 학생에게 요구하는 말이라면, 이 문장은 학교와 학생이 서로에게 건네는 약속에 가깝다. 네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도 너의 자랑이 되겠다는. 졸업하고 나서 이 문장이 새삼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다.

이 분수대에 친구들을 빠뜨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탑에 얽힌 기억 중에 가장 선명한 건 교훈도 동판도 아니다. 이 분수대에 친구들을 빠뜨리던 장면이다.
축제 기간이면 밤늦게까지 광장이 들썩였고, 누군가 생일이라도 맞으면 어김없이 알바트로스 분수행이었다. 몇 명이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들어 올려서 물속에 던져 넣으면, 흠뻑 젖은 주인공이 수반 안에서 허우적대고 나머지는 석단에 앉아 배를 잡고 웃었다. 생일 축하 노래보다 물 튀는 소리가 더 크게 기억에 남는다.
물론 매번 웃으며 끝나지는 않았다. 한번은 장난이 과해져서 나까지 휘말렸는데, 넘어지면서 분수대 돌 모서리에 등을 제대로 찍혔다. 사진에서 보듯 수반 가장자리가 전부 단단한 돌로 둘러져 있어서, 물이 얕은 만큼 부딪히면 꽤 아프다. 며칠 동안 등에 멍을 달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다들 크게 안 다친 게 다행이다. 그래도 그 시절 서강을 떠올리면 이 분수에서 흠뻑 젖은 친구들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서강이 어떤 학교인지 보여주는 첫 장면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이 탑이 서 있다는 건 꽤 의미 있는 배치다. 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게 건물도, 간판도 아닌 ‘진리에 순종하라’는 한 문장이라는 뜻이니까. 서강이 어떤 학풍을 지키려 하는지, 무엇을 향해 공부하라고 하는지를 이 탑 하나가 말없이 설명한다.
계단 위에서 정문 쪽을 내려다보면 원뿔 모양 뒷면 너머로 도시의 빌딩들이 펼쳐진다. 탑 끝은 학교 바깥을 향해 있다. 가장 멀리 난다는 알바트로스처럼, 여기서 배운 걸 품고 저 밖으로 날아가라는 뜻으로 읽힌다. 졸업하던 날 이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비슷한 걸 느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