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앞에서 저녁 약속을 잡으면 메뉴를 정하는 건 생각보다 금방 끝난다. 고기가 당기면 김숙성, 사케를 곁들여 오래 앉아 있고 싶으면 부산집, 오늘은 좀 제대로 먹자 싶으면 물고기집. 이 동네를 몇 년 오간 사람이라면 대충 이렇게 나뉜다는 걸 안다.
얼마 전 밤에 이 세 집을 한 바퀴 돌아봤다. 밥을 먹으러 간 건 아니고 그냥 걷다 보니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불이 켜져 있는 가게들을 보고 있자니, 이 집들이 이 동네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고기 생각나는 날엔 김숙성
골목 모퉁이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초록 네온이다. 벽돌 건물 2층 높이에 세로로 걸린 간판이 초록빛을 뿜어서, 위층 창문까지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멀리서 봐도 ‘아, 저기 김숙성이구나’ 싶다.

1층은 투명한 비닐 천막으로 둘러져 있는데, 날이 쌀쌀해지면 이게 은근히 반갑다. 바깥바람은 막아 주면서 거리 쪽으로 반쯤 열린 기분이 들어서, 실내와 야외 사이 어딘가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가게 앞에는 파란 맥주 상자가 겹겹이 쌓여 있고, 둥근 상판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다. 손님이 몰리면 저 상판을 꺼내 자리를 늘리는 모양이다.
조금 더 다가가 보니 천막 안쪽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 한쪽에선 직원이 서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테이블에선 친구들끼리 고개를 맞대고 웃고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곳은 아니다. 오히려 투박해서 편하다. 과 모임이든 동아리 뒤풀이든, 일단 모이면 여기부터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그 편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집이 오래 버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학생 동네의 고깃집은 금방 생겼다 금방 사라지기 일쑤인데, 김숙성은 학번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 왔다. 선배 손에 끌려 처음 왔던 신입생이 몇 년 뒤엔 자기 후배를 데리고 오는 집. 이런 가게가 진짜 동네 단골집이다.
사케 한잔에 이야기가 길어지는 부산집
김숙성이 왁자지껄하게 고기 굽는 곳이라면, 부산집은 술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가 길어지는 곳이다. 고기로 배를 채운 뒤 2차로 넘어가기도 하고, 처음부터 사케 한 병 시켜 놓고 조용히 앉아 있기도 한다.
부산집은 경의선숲길 바로 건너편에 있다. 숲길 잔디밭에 서서 나무 사이로 길 건너를 보면, 나무 판자를 덧댄 외벽 아래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가게가 보인다. 간판은 붓글씨처럼 흘려 쓴 글자다. 양옆으로는 다른 가게들과 디저트 가게 간판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 그 사이에서 부산집만 유독 따뜻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위치가 부산집의 숨은 장점이다. 한잔하고 나와서 바로 숲길을 따라 걸을 수 있으니까. 술기운이 살짝 오른 채 잔디밭 옆 벤치에 잠깐 앉아 있다가 집으로 향하는 코스는, 이 동네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걸어 봤을 거다. 그날도 가게 앞에 몇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인지 나온 뒤인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자리를 뜨지 않는 그 모습이 어쩐지 이 집다웠다.
조금 큰맘 먹고 가는 물고기집
세 집 가운데 막내는 물고기집이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됐고, 앞의 두 집과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은 깔끔한 건물 2층에 둥근 물결 로고와 ‘물고기집’ 간판이 걸려 있고, 커다란 창으로 따뜻한 나무톤 실내가 훤히 보인다. 건물 위쪽엔 “nice work today"라는 네온 문구가 켜져 있고, 아래층엔 주짓수 체육관이 들어서 있다.

물고기집에선 스시를 먹는다. 다만 가격대가 있어서 학생들이 매일 드나드는 곳은 아니다. 시험이 끝났다거나, 누가 취업에 성공했다거나, 부모님이 학교 근처에 오셨다거나. 뭔가 이유가 있는 날 떠올리는 집이다. 김숙성과 부산집이 ‘늘 가는 데’라면 물고기집은 ‘오늘은 특별히’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집이 하나쯤 있다는 게 꽤 괜찮다. 학교 앞이라고 늘 싸고 양 많은 집만 필요한 건 아니니까.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 멀리 나가지 않아도 근사하게 한 끼 할 수 있는 곳이 걸어서 닿는 거리에 있다는 건, 동네 입장에서도 반가운 변화다.
서강대 앞을 든든하게 지키는 세 집
밤길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세 집의 성격이 더 또렷해졌다. 김숙성은 시끌벅적하게 모여 고기 굽는 곳, 부산집은 숲길을 마주 보고 잔을 기울이는 곳, 물고기집은 큰맘 먹고 제대로 대접하고 싶을 때 가는 곳.
오래된 두 집은 수많은 학번의 추억을 품고 같은 자리를 지켜 왔고, 새로 생긴 한 집은 이제 막 자기 이야기를 쌓아 가는 중이다. 결은 다 다르지만 셋 다 서강대 앞에 단단히 뿌리내린 가게들이다. 다음에 이 동네에서 약속이 생기면 메뉴 고민은 짧게 끝날 것 같다. 오늘 기분이 고기인지, 사케인지, 스시인지만 정하면 되니까.
